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마지막 식사
“하이, 그랜마!”
몸집이 큰 스캇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선다. 휠체어에 앉아 그를 맞는 할머니의 얼굴이 소녀처럼 맑다. “하이, 스캇!” 구십 세를 훌쩍 넘어선 그녀가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반갑게 맞아준다.
호흡기를 사용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는 우리 모두의 할머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 차가운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색색의
야채를 곁들인 먹음직스러운 불고기가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저기서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건물 밖까지 이어지는 행렬에 마음이 급하다. 음식을 나눠주는 이들이나
받는 이들 모두 손길이 바쁘다.
은발이 멋진 할머니 두 분이 나란히
서서 샐러드를 접시에 담고 있다. 고운 미소와 함께 버물린 샐러드가 더욱 신선해 보인다. 눈을 맞춰 인사를 나누며 드레싱을 얹어주고 있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사랑의 드레싱이 부드럽게 감싸준다.
“땡큐, 땡큐.” 감사가 날개를 달고 넓은 홀을 날아다닌다. 접시 가득 음식을 받아든 이들의 얼굴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표정이다. 창밖에서
지켜보던 햇살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목요일 오후, 홈리스들과 만나는 날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십여 년간 미국인들과
함께 무숙자 사역을 해왔다. 그런데 교회 주위에 사는 주민들의 반발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린 탓이다. 마구 버린 쓰레기나 주사기를
보면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주눅이 들곤 했다. 계속되는 민원으로 관공서에서도 골치를 앓다가
결국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식사를 마치자 더 이상 교회 건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광고를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들은
이내 평상으로 돌아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섭섭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미꾸라지 노릇하던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보고
싶을 거라 했다. 흩어져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먹먹한 가슴으로 지켜봐야 했다.
거의 일 년이 되어서야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모두가
반갑고 기뻤다. 새로운 얼굴도 있었지만, 낯익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더욱 정성을 기울여 음식을 준비하고,
깨끗하게 뒷정리를 했다.
우리들 모두 그 장소를 지키기 위해 한 마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마지막 식사 시간을 맞게 되었다.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서야
했다. 다행히 가까운 미국교회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면 하늘이 넓게 보이는 유리창이 멋진 곳에서 우리는 만나게 된다. 반가운 얼굴로 함께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그들을 만나는 것이 기쁘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벗어버린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더욱 기쁘고 반갑겠다. 그들
중에는 일자리를 찾아서 거리의 삶을 청산한 이들도 있으니까.
한 청년의 모습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는 식사 때마다 아주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닥 청소와 의자 정리를 한 후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몰아쳤을 세찬 폭풍우를 가늠해보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며 한
끼의 밥을 해주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들 중 많은 이가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밥을 퍼주며 평안을 빌다가도 회의에 빠질 때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어쩌면 늪의 바닥과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이들이 더러 있다. 마음과 마음이 어우러진 기도의 향연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어딘가에서
어긋난 삶이 회복되어 부서진 꿈이 다시 피어나기를, 그들의 집이 다시 세워지는 날이 너무 멀지 않기를, 찬찬해 보이던 청년의 눈 속에도 참 생명의 빛이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만남을 위해 정성을 다한다. 불고기를 준비하고 야채를 손질한다. 하나, 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
스스로,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식사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며 밥을 퍼주려 한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누군가 저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식사. 가슴이 저렸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저들 중 누군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고 선언하는 그 날이 모두에게 꿈을 나누어주는 마지막 식사가 되기를.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던 그분의 눈빛을 생각한다.
<서북미 문인들의 다양한 작품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