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담임)
상실의
아픔
남편과 세 딸들을 데리고 다복하게 살아가는 한 어머니가 있었다. 평생을
선생님으로 학교에 몸담고 제자들을 길러낸 보람으로 교감 승진도 앞두고 있었다.
마침
회식이 있어 참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딸들을 위해 무엇인가 야식이라도 사들고 가려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 마침
딸이 전화를 받기에 치킨을 사갈까? 하고 물었더니, 지금은 다이어트 하고 있으니 그냥 빨리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아파트 단지 앞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려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섰다가 파란불로 바뀌자 횡단보도로
들어서는 순간 만취상태로 운전을 하던 28살의 SUV가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무려 28m나 날아가
떨어진 그녀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비보를 듣고 달려 나온 가족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땅을 치며 후회했다. 엄마께 치킨을 사오라고만 했어도 이렇게 비참한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다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1:24~25)고 말이다.
죽은
사람도 안타깝지만 살아 있는 가족들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를 잃은 그 상실감은 사는 날
동안 그들의 빈 가슴을 아리고 아프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비참한 사고는 아닐지라도 삶 속에서 무엇인가는 잃어버리고
아파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부모님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으며 사업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실은 아픈 것이고 고통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며 주어진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 하나 있다.
엘리자베스 퀘블러박사가 쓴 <인생수업>이다. 정신과 의사로 상실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평생 동안 치료하고 상담해
온 정신분석자이기에 큰 도움이 된다. 가장 근본적인 치료는 아픔을 나누는 것이다.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가슴을 열어 놓고
아픔을 나눌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필자도 미국이라는 제한된 사회에서 30~40대를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어봤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사람보다 훨씬
더 확실한 전문가이신 예수님이시다.
결코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는 만인의 스승이요 친구요 치료자이시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11:28~29)
어쩌면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가상 소중한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상실하고 살아가기에 늘 가슴 한 구석이 비어 있는 허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내세와 남은 가족들을
책임져주시는 그 한 분 예수님만은 꼭 잃지 말아야 하겠다. 인생이 장구하고 재물이 소중한 것 같지만 하늘을 날고 있는 연줄과 같이
한 순간에 그 실이 끊어지면 만사가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마지막 순간에 찾아와서 울어
줄 사람을 만들어가야 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봐야 한다.
고인이
되어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누워 있지만 그 사람의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그 순간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죽어서
칭찬 듣는 사람,
바로 그 사람만이 크고 작은 상실 속에서도 인생을 승리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아프니까
인생인 것이다.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우리 모두 절망하지 말고 오늘 살아서 숨 쉬고 있기에 감사하며 내일은 주님께 맡겨드리는 소박한
신자로 거듭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