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자 수필가(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오! 재판장님
본격적인 여름 날씨다. 그동안 구름으로 가리워진 찌푸듯, 흐린 공기가 오늘은 맑은 기로 정화
되었는지 상쾌하고 기분 좋은 여름 온도다.
아침부터 다른 날과 달리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평온함이 깃들고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웬일일까? 지금쯤 걱정으로 불안한 가슴이 되어 있을 내가 아니던가?
사십여년을 운전하면서 기록이 좋았다. 표(티켓)도 받은 적이 없는 모범운전사로 자부했던 터라, 그런 일은 결코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손녀가 학교 버스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 맞추어 후리웨이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많은 차량들이 멈추어져 움직이질 않았다. ‘사고가 난 탓일까?’
손목 시계를 보니 조바심이 생겼다. 손녀가 집 문 밖에서 서성거리며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떠올라 초조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앞차가 빨리 다른 차선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그 길을 택하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순간 나도 앞차 따라 재빨리 미끄러져 나갔다. 일 분쯤 지났을까? 검은 스포츠 승용차에서 깜박깜박 빛을 발하며 내 뒤를 쫓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뒷거울로 힐끔힐끔 쳐다 보면서….
어떤 젊은이의 장난치는 질주로 추측해, 무시하며 계속 운전을 했다. 갑자기 “옆으로 서라!” 는 방송이 들려왔다. ‘내가 뭘 잘못했지?’ 젊고 미남 순경이 친절한 말씨로 “너 괜찮니?” 인사를 했다. “내가 잘못 운전했니?” 물었다. 그는 “틀린 차선으로 운전했다.” 고 짧게 답변했다.
머리를 갸우뚱하는 나에게 “아 유 오케이?” 하면서 “앞으로 조심히 운전하라”고 타일렀다. 벌금 티켓을 받고, 상식적인 요금이려니 했던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액수에 깜짝 놀랬다.
아들과 함께 살면서, 아들의 이름으로 등록된 차를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벌금을 아들의 몫으로 넘기면 되겠지만 억울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걱정 말라”는 아들을 설득했다. “내가 직접 법정에 가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벌금을 내리라”고 강한 의지로 주장했다. 미국에 온후 처음으로 미국 법정에 선다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복잡해지는 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나 자신에게 용기와 격려로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한 삶의 방향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나아 갈 훈련의 날로 삼고 싶었다.
디-데이. 온화한 날씨가 나를 반기며 법정으로 안내했다. 아담한 뜰로 둘러싸인 법정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지품 조사가 있었다. 손가방 안에서 지저분한 물건들이 제가끔 창피하다고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게으름의 결과가 낳은 생활 방식이 망신 당하는 장면이었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제복 입은 남자가 친절히 안내해주어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렸다.
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읽어보니, 내 눈에 다양한 색깔로 다가왔다. 스마트 폰을 뚫어지게 보는 사람, 고민의 그늘에 지쳐있듯, 기운없이 초점이 흐린 사람, 뭔가 각오하는 듯 굳어진 표정의 사람, 책을 읽으며 평온을 찿는 것같은 사람 등등 미소나 웃음으로 대화하는 정의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었다. 그만큼 심각한 시간에 머물러 있는 표정들이 아닌가 싶었다.
드디어 재판 시간을 알리니 이십여명이 열려진 큰 문으로 우르르 들어가 앉았다. ‘저 많은 사람들이 약식재판을 받아도 시간이 꾀 걸릴텐데…’ 내 통역관은 어디 있지? ‘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그때에 목인사로 간단히 말을 건넨 여자 통역인이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리신, 지긋이 나이든 재판장님이 가운을 입고 미소지으며 당당히 들어섰다.
그는 약식재판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우선 통역자와 함께 온 자들은 먼저 재판을
받는다고 했다. 빨리 끝낼 수 있다는 기쁨에 미소를 품었다. 나의 통역인은 중년의 여성으로 사무적인 책임감에 충실한 직장인의 면모를 보이는 듯 싶었다.
첫 번째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심 ‘그의 질문에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신경이 쓰여져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 어떤 질문도 없이 “컴퓨터를 통해 너의 기록을 보니, 틀린 차선으로 운전했구나! 네가 혼동했나 보다, 이번에는 벌금형 없다. 그 대신 앞으로 운전할 때는 옆에 다른 사람을 태우고 하거나, 다른 사람이 운전하고 그 사람 옆에 네가 타고 가든지 안전하게 운전해야 됨을 경고한다.”는 진심어린 부탁이 있었다.
나는 뜻밖의 결과에 “땡큐 땡큐” ‘오! 재판장님 ! 감사, 감사합니다.’가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이었다. 통역인이 “벌금 내지 않아도 됩니다.“ 라는 말은 내 귓전에 맴돌았을 뿐 마무 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얼떨결에 법정 밖으로 나왔다. 훨훨 날아갈 듯 좋았다.
아직도 미국은 약자 편에 서서 도와주고 있구나! 하는 고마움이 그 약식 재판에서 느낀 점이었다.
그 재판장은 “ 여러분 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 벌금을 낼 수 없는 형편에
있다면, 나중에 와서 말하라”고 했다.
재판장님이 인류사랑 사상이 몸에 베어 있어서일까 알 수 없지만, 역시 이 미국이 세계 곳곳에 필요한 교통정리를 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안심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닐까?
비록 미국에 이민 온 이방인으로 살고 있지만 진심으로 감사함이 마음 속 깊게 새겼던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이었다.
이제 새해를 맞게 된다. 마지막 달력은 며칠 만을 남기고 쓸쓸히 물러갈 태세다. 다시 밝아 오는
새해의 각오가 새롭다.
새해에는 방심해서 일어날 일들, 알게 모르게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이 절대적으로 없어야겠다고 결단한다. 왜냐면, 재판장님이 나에게 내린 벌금없는 경고장은, 앞으로 나의 삶에 알찬 행복의 씨앗을 뿌리게 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