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
회원)
김장
늦가을에 한국 방문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풍성한 수확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감을 따서
곶감을 만들고 홍시를 따 먹고 밤을 줍고 대추를 따서 말렸다. 날씨는 점점 싸늘해져 가고 드디어 무서리가
내렸다.
호박잎, 고춧잎, 맨드라미 꽃잎이 하루 아침에 무서리라는 자연의 심판을 받고 새카맣게 죽어갔다.
밭과 들은 황량한 죽음의 세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무, 배추는
무서리 심판을 어기고 새파랗게 오히려 생육이 왕성해지고 있다.
무서리를 맞고 나서 배추는 몰라 보게 포기를 안는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해 추워야 결구(結球)를 한다. 배춧잎이 속에서 단단하게 쌓여 공처럼 차는 것이 결구이다. 무도 무서리를 맞아야 밑동이 굵어진다.
무 밑동은 점점 자라 땅 위에 하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서리가 내릴 무렵 하얀 무 밑동은 아가씨 각선미처럼 매끈한 모습을 보인다.
높은 두둑에 서 있는 수백 개의 무 밑동은 일렬로 도열한
여학생의 통통한 종아리 같다. 하얀 무 밑동은 농녹색(濃綠色)인 무청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되어 부동자세로 서 있다.
훈육 지도 선생의 우렁찬 구령 소리가 들려온다. 차렷! 열중쉬어! 앞으로 가!
구령 소리가 떨어지면 무 밑동은 일사불란하게 동작한다. 검은 흙색과 하얀 무색 그리고 짙은
초록색의 조화는 단조로운 배추와 비교해서 세련미가 훨씬 아름답다.
날씨가 영하권으로 떨어진다. 이제 김장을 할 때가 되었다. 결구한
배추와 싱싱한 무를 보니 어린시절 우리 집 김장하던 때가 생각났다.
어렵게 살던 시절 식량이 부족했던 때라 김장은 우리 집 제2의 양식이었다. 머슴을 둘씩 두고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배추를 엄청이나
많이 가꾸었다. 그리고 150포기가 넘는 배추로 김장을 하였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집집마다 100포기 이상의 배추로 김장을 하였다. 안마당에는 결구 배추와 동치미
담을 무로 가득하였다.
김장하는 날은 이웃 어른을 오라 해서 뭇국을 끓여 아침을
대접하였다.
배추가 많다 보니 이웃끼리 품앗이로 상부상조하며 김장을 하였다.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은 10여 명의 이웃 아주머니들이 분업적으로
일을 맡아 도와주었다.
고무장갑이 없는 때라 양념배합을 맨손으로 하기 때문에 팔뚝까지
빨간 고춧가루 양념이 묻어 손과 팔이 쓰려 고생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으로 절인 배추를 운반하여 배춧잎 사이
사이에 양념한 배추 속을 넣으며 어머니는 나를 오라 해서 시뻘건 배추 속이 들어 있는 작은 배춧잎 하나를 손으로 집어내 입속에 넣어주었다.
어제 밤새 황석어젓을 고아 새우젓과 같이 양념에 넣어서인지 비릿하면서 짭짤하고 맵고 아릿하여 눈물이 날 만큼
자극적인 맛에 진저리를 쳤다.
각종 젓갈, 고추가루, 마늘, 생강, 청각, 쪽파, 소금 등 여러 양념이 뒤섞여 내는 독한 맛에 금방 얼굴이
빨게진 나를 보고 어머니는 “아직 익지 않아서 그렇다. 이제
익으면 훨씬 맛이 있단다”라며 물을 마시라고 하셨다. 익으면
맛이 있다는 어머니 말씀을 어린 그때는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숙성되고 발효되면 맛있다는 그런 뜻이었다.
그렇다. 김장김치는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효모(酵母)가 김장김치
속에 들어가 발효가 시작되어 맛있게 익는다.
발효는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잘못되면 맛이 시고 심지어 부패한다. 그래서 김치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눈발이 펄펄 내리는 날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김장을 했다. 그때 기온은 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땅에 묻어둔 항아리에 김장김치를
담아야 맛있게 발효한다는 것을 체험에 의해 지혜를 얻었었다. 김장을 한지 20일이면 배추가 각종 양념과 숙성되어 맛있게 익어간다.
시집와서 김장 스물 다섯 번 담그면 할머니가 된다는 속어도 있지만 시대도 많이 변해서 갈수록 번잡스런 김장을 하지 않고 마트에서 사 먹는
시대가 되었다.
속이 톡 찬 결구 배추는 된서리가 온 오늘 아침 김장을 하기 위해 뽑혀 각 가정으로 운반되겠지만 김장을 하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 많은
배추는 밭에 그냥 남아 얼어 죽을 것이고 자식처럼 가꾸느라 지독한 혹서에 고생한 농부의 시름은 깊어질 것이다.